티스토리 뷰

통도사 암자 순례, 두 번째는 보타암 이야기입니다

보타암은 통도사 산내 암자 가운데 유일하게 비구니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보타암은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보타암, 향기로운 세상을 열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돌담 기와 위로 햇살이 내려앉는다. 손을 뻗어 서로 하늘 위로 끌어올리는 담쟁이 모습이 정겹다. 통도사 암자 순례에서 처음 만나는 암자가 바로 보타암(寶陀庵)이다. 보타암은 통도사 일주문 앞 삼성반월교를 건너 솔밭주차장을 통과해 영축산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약 300m 지점에 있다. 통도사에서 유일하게 비구니 스님이 거처하는 암자다.

 

보타암의 가을, 2017년

 

보타라는 이름은 관세음보살이 거주하는 산으로 알려진 인도 보타락가(補陀洛迦) 산에서 인용한 것이다. 원래는 동운암(東雲庵)이란 이름으로 현재 부도원(浮屠園) 뒤편에 있던 암자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일주문 앞까지 장사치들이 난전을 벌이고 있어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기에 환경이 좋지 않았다.

 

한국 근대불교 고승인 경봉 스님이 감원(監院, 산내 암자 운영을 책임지는 스님에게 주지라는 호칭 대신 사용하는 말)인 영춘 스님에게 이전을 권유해 1927년 지금 위치로 옮기게 됐다.

 

보타암 창건 후 수행에 전념하던 스님들은 6.25 전쟁으로 또 한 번 시련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나고 통도사에 육군 병원을 설치했는데, 지금 통도사도서관 자리에 야전병원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부상자들 치료를 위해 가장 가까운 암자였던 보타암을 내줘야만 했다.

 

결국, 스님들은 3년 동안 다른 절에 흩어져 지내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보타암은 황폐하게 망가져 있었다. 스님들은 아무도 탓하지 않고 자신들의 수행 공간을 묵묵히 보수하며 수행을 이어갔다. 아름답기만 한 보타암에 역사의 상처가 숨어 있었던 셈이다.

 

보타암 입구, 2017년 여름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암자 입구가 나오는데, 문 양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향나무가 먼저 찾는 이들을 반긴다. 마치 사찰 입구를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처럼 서 있는 향나무는 위엄보다는 온화함으로 다가온다.

 

조심스럽게 문을 지나면 반들반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자갈마당이 펼쳐진다. 법당으로 이어지는 중앙에는 맷돌 박석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행여 바삭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수행 공간을 방해라도 할까 몸가짐이 더욱 조심스럽다.

 

보타암 주불전, 2017년 가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보타암은 원래 주불전이 관음전이었다. 현재 본당(本堂)에는 석가모니불이 중앙에 모셔져 있고, 양옆에 협시보살(脇侍菩薩, 본존불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있다. 1993년 본당을 중창하면서 석가모니불과 이전부터 모셨던 관세음보살을 함께 두고 있다. 낮은 언덕 위에 서 있는 본당에는 구하 스님이 쓴 편액이 걸려 있고, 주련(柱聯, 불교의 깨달음을 기둥에 적어 놓은 글귀)은 월하 스님이 쓴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들여다보면 불단 뒤로 보이는 후불탱화(後佛幀畵, 불단 뒤쪽 벽에 걸어놓는 족자에 그린 불화)가 예사롭지 않다. 불단 크기에 비해 작은 듯 보이는 탱화는 이전부터 사용했던 것을 본당을 크게 넓히면서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보타암 후불탱화, 2017년 여름

 

보타암 후불탱화는 국내 불교 미술 3대 대가로 알려진 월주 스님의 초창기 작품이다. 대표작인 경주 불국사 관음전 천수관음탱화를 남긴 인간문화재 48호 단청장 월주스님 처녀작으로 보타암을 위해 이 탱화를 그렸다. 월주 스님은 탱화 작업 당시 옷을 3벌 준비했다고 한다. 하나는 작업할 때 입는 옷이고, 하나는 일상복으로, 또 나머지 한 벌은 화장실 갈 때 입는 옷이었는데 작품에 임하는 스님의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야기다. 스님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반드시 몸을 깨끗이 씻고 나서야 붓을 들었다고 하니 보타암에서 탱화를 각별하게 여기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중창을 거듭하면서도 월주 스님 탱화가 불단을 지키는 사연이다.

 

보타암 탱화는 비전문가 눈으로 봐도 여느 탱화와 다른 화풍을 느낄 수 있다. 불상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중앙에 서 있는 부처와 양옆으로 일렬로 늘어선 수행 보살과 불제자들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화려하기보다 간결하고, 섬세하게 느껴진다. 특히 보통 탱화에선 부처가 좌정해 중심을 잡고 그 좌우상하로 보살과 불제자들을 배치하는 것과 달리 보타암 탱화에서 부처 역시 보살과 불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성적 느낌이 강한 보통 탱화와 달리 섬세한 선과 은은한 색으로 묘사한 보타암 탱화는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공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신중단(神衆壇,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을 모신 단)에 모신 탱화 역시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인연이 있다. 보타암 신중탱화는 월주 스님과 함께 불화장(佛畵匠)인 완호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권정두 선생의 아들 권영관 불화장 작품이다. 한 스승 아래에서 배움을 익히고 대를 이어 우리나라 불화를 지켜온 대가들 작품이 같은 공간에 나란히 걸려 있는 셈이다. 한참을 두 탱화를 번갈아 보며 섬세한 불화의 아름다움에 취해본다.

 

보타암 경내와 영축산, 2017년 가을

 

따스한 햇볕이 본당 안으로 스며들 때 즈음, 본당 바깥으로 보이는 영축산의 아름다운 자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통도사 금강계단을 마주하는 사자목 위 오층석탑이 숲 사이로 자태를 드러낸다. 정갈한 마당에도 햇살이 내려앉아 평온함을 더한다.

 

보타암은 본당을 중심으로 약사전, 요사채, 식당, 창고 등이 자 형태로 배치돼 있다. 그 주위로 기와를 얹은 돌담이 암자 전체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영축산 기운 가득한 보타암은 마치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건물 배치를 보인다. 비구니 스님이 수행하는 암자라는 생각 탓일까 정원 구석구석 섬세한 배려가 엿보인다. 햇살을 한껏 받은 마당 한편에는 마치 쉼터처럼 너른 바위가 놓여 있고, 단풍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

 

봄이면 형형색색 들꽃이 암자를 향기로 채운다. 특히 보타암에는 보통 붉은색 꽃을 피우는 금낭화가 아니라 흰 금낭화가 펴 찾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을이면 요사채 앞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면서 붉게 물든 단풍과 함께 가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보타암 경내, 2017년 가을

 

보타암 곳곳을 눈으로 훑으면 아름다운 향기가 느껴진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영축산 아래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보타암 정취에 잠시 마음을 내주고 감원인 재근 스님 이야기를 떠올렸다.

 

보타암을 창건한 영춘 스님이 1993년 가을 열반에 들 때 암자 안은 신비로운 향기로 가득 찼다고 한다. 스님들이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름다운 향기였다. 영춘 스님 다비식 후에는 산내 곳곳에 그 향기가 퍼져 다비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고.

 

그래서일까? 보타암은 마치 부처의 향기처럼 느껴지는 편안함이 가장 먼저 마음을 두드린다. 부처의 향기를 느끼며 발걸음을 약사전(藥師殿)으로 돌렸다. 원래 약사전은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시는 곳이지만 보타암에는 약사여래와 나반존자(那畔尊者), 산신이 함께 봉안돼 있다.

 

약사전을 나와 본당을 바라보니 팔작지붕 너머로 영축산이 눈에 들어온다. 보타암은 우리나라 전통 지붕양식을 다양하게 둘러볼 수 있는 암자다. 본당과 요사채는 팔작지붕으로 돼 있지만 약사전은 맞배지붕으로 돼 있다. 그리고 현재 창고용도로 사용하는 건물은 우진각지붕이다. 작은 암자지만 다양한 전통 지붕양식을 살펴보는 일도 보타암을 찾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보타암 약사여래불, 2017년 여름

 

본당과 약사전 사이 뒤편 석축에는 작은 약사여래불상이 하나 모셔져 있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는 약사여래불은 보타암 원행 스님이 가져다 놓았다. 어느 날 골동품 가게 한 편에 놓여 있던 약사여래불과 만나는 순간, 자신을 데려가라고 말하듯이 바라보던 불상은 원행 스님과 염화미소(拈華微笑)라도 통했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개구쟁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 약사여래불이다.

 

20039월 태풍 매미가 휘몰아쳤을 때 본당 뒷산이 무너져 내렸지만 다행히 본당을 피해갔다고 한다. 본당과 약사전 사이로 흙과 돌이 빗물에 쓸려 쏟아져 내리면서 원래 계단이었던 샛길이 무너져 지금은 경사로 형태로 바뀌었다. 그리고 무너졌던 그곳에 상처를 치유하려는 듯 약사여래불이 자리하고 있다. 태풍은 또 다른 선물도 남겼다. 약사전 뒤편 석축이 무너지고 커다란 바위가 드러났는데 그 모양이 거북이 두 마리가 서로 등을 맞대고 돌아앉은 형상이다.

 

아기자기한 암자 곳곳을 둘러보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첫 암자부터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줄 미처 몰랐다. 걸음을 서둘러 다음 암자인 취운암(翠雲庵)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래도 못내 아쉬워 담장 너머 보타암을 돌아보며 영축산 아래 어머니 품 같은 풍경을 마음에 담아본다.

 

>>>취운암, ()과 선()을 취하다(계속)

 

 

이 글은 양산문화원 위탁을 받아 진행한 통도사 암자 순례책자 발간 사업에 제가 취재수록한 내용을 양산문화원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모든 저작권은 양산문화원에 있습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