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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암자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암자가

바로 '서운암'입니다

봄을 맞은 서운암은 들꽃향기로 가득합니다

찾는 이를 제일 먼저 반기는 장독 행렬은

서운암의 첫 인상이기도 하죠

 

하지만 서운암은 겉으로 드러난 들꽃축제와 천연염색, 장독 사이로

기다림의 미학을 간직한 곳입니다

 

알고 보면 더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서운암의 세계를

함께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봄의 서운암으로 떠나보세요

 

서운암, 2017년 여름

 

서운암,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다

 

수도암을 빠져나와 서운암(瑞雲庵)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층 가볍다. 암자 입구에 채 들어서기 전 길 양편으로 나 있는 나무 사이로 햇살이 먼저 반겼다.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정면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장독들을 바라본다. 햇살을 한껏 머금은 장독 안에 정성으로 담근 장들이 조용히 세상에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서운암은 통도사 암자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봄을 알리는 들꽃축제로 더욱 유명하다. 하지만, 서운암은 단지 대중적인 암자만은 아니다. 서운암에 관한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이미 고려 충목왕 2(1346) 충현(沖絢) 대사가 창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깊은 유서를 가진 암자인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암자 모습은 1985년 성파 스님이 감원으로 암자를 이끌면서 중건한 것이다. 해마다 아름다운 들꽃을 즐길 수 있는 서운암은 성파 스님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사라져가는 옛것을 현대에 되살리려는 마음에서 비롯한 스님의 열정은 비단 들꽃뿐만 아니라 오늘날 서운암을 사람들에게 알린 약된장, 천연염색, 십육만도자대장경 그리고 옻칠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함께 사람들과 성과를 나누고 있다. 서운암을 찾는 많은 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성과는 오랜 기다림 끝에서야 얻을 수 있는 인내의 산물이다.

 

서운암 삼천 불단

 

성파 스님이 처음 서운암에 왔을 때만 해도 인법당과 요사채, 산신각 등이 겨우 암자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대부분 건물을 중수하고 삼천불단과 선원이 자리하게 됐다. 성파 스님은 서운암으로 오기 전 사명암에 있을 때부터 전통 도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직접 가마를 꾸려 다기(茶器)와 발우(鉢盂) 등을 만들었는데 서운암에 와서도 이 일은 계속됐다.

 

하지만, 성파 스님은 서운암 가마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것보다 불상을 만드는 일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도자 불상을 제작하는 일을 시작했다. 1985년부터 시작한 삼천 불단 조성 불사(佛事)19881천불을 봉안했고, 이후 1990년에 와서야 삼천 불단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현재 본당에 모신 삼천 불단은 오랜 세월 뜨거운 불길을 견뎌낸 인고의 시간이 깃든 것이다.

 

삼천 불단 조성을 마무리하고 다시 성파 스님은 도자대장경 제작을 시작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부처님 힘으로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만들었다면 서운암 대장경은 세계 평화와 민족통일을 이루자는 염원을 담고 있다. 목판 양면에 새겼던 팔만대장경과 달리 도자대장경은 한 면에 글을 새길 수밖에 없어 모두 163천여 장이나 된다. 완성한 십육만도자대장경은 서운암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 장경각(藏經閣)에 봉안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불과 정성이 빚은 도자대장경은 이 순간에도 찾는 이들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서운암 장경각, 2017년 가을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도자대장경을 빚는 데만 10년이 걸렸고, 대장경을 완성하고도 장경각을 짓는데 또다시 10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했다. 1990년 처음 불사를 시작한 이래 20년 동안 이어진 끈질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나무장작을 태워 불을 일으키는 전통방식으로 가마를 운영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세월, 뜨거운 불 앞에서 호국불교의 정신을 이으려고 밤을 지새웠을 스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고사는 서운암에 가장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말 속에는 끊임없는 수행과 정진으로 깨달음을 얻는 수도자의 모습이 겹친다. 해마다 봄이면 서운암 산자락을 물들이는 들꽃에도 우공이산의 정신이 숨 쉬고 있다. 작은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생명의 고귀함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숨어 있다.

 

서운암 들꽃축제, 문학인 꽃축제

 

서운암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해마다 4월이면 열리는 서운암 들꽃축제다. 2002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들꽃축제는 4만 평에 달하는 넓은 산자락에 20여 종이 넘는 들꽃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시작은 1998년부터 이뤄졌다. 처음 성파 스님은 양산 시목(市木)인 이팝나무와 양산지역 출신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의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살구나무를 각각 1천 그루 심으며 야생화 단지를 조성을 시작했다. 걷기 좋도록 길을 내고, 버려진 땅에 들꽃이 자라도록 사철 보살폈다.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성파 스님이 들꽃 축제와 전국 문학인 축제를 2011년부터 함께 한 일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전통 춤과 음악, 문학이 함께 하는 들꽃 축제는 양산지역을 넘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자연과 예술의 장이다. 생명을 노래하고, 사람과 자연의 인연을 되새기는 들꽃축제는 어쩌면 화엄세계(華嚴世界)를 현실에 재연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들꽃과 함께 서운암이 펼치는 또 다른 화엄세계는 바로 천연염색이다. 서운암 천연염색은 쪽잎을 따서 큰 항아리 넣고 연수를 부어 한 번 뒤집은 다음 하루가 지나면 쪽을 건져내 콩대나 메밀대 등 초목을 태운 재를 넣어 장시간 발효시켜 완성하는 전통방식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 쪽빛염색은 크게 전라도 나주와 서운암 방식으로 나누는데 나주 경우 바닷가와 인접한 지역이라 재로 조개껍데기 등을 사용한다. 들꽃축제와 함께 봄이면 열리는 천연염색 축제 역시 서운암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색()의 향연이다.

 

서운암 천연염색축제

 

1988년 처음 쪽을 재배하기 시작한 성파 스님은 이후 전통 염색방식을 연구계승하고 대중에게 전파하려고 노력해왔다. 스님이 천연염색을 시작한 것 역시 수행과 무관하지 않다. 처음에는 감지(紺紙, 감람색을 물들인 종이)에 사경(寫經, 불교경전을 옮겨 쓰는 일)을 하려고 쪽을 심었다. 사경을 통해 부처님 말씀을 대중에게 전하고, 스스로 수행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이후 천과 옷감에 염색하는 방법까지 연구해가며 우리 전통을 대중화하는 일에 앞장섰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서운암은 해마다 연초면 천연염색 강좌를 개설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천연염색과 연관된 다양한 교육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서운암 입구에 들어서면 찾는 이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햇살 아래 늘어선 장독들이다. 서운암 약된장은 성파 스님이 직접 개발한 한약재를 첨가해 만든다. 된장 외에도 각종 장류를 담아 일반에 판매하고 있다.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은 순수한 재료의 힘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장은 발효식품이다. 오랜 세월 천천히 숙성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맛을 찾을 수 있다. 이전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수행의 과정을 닮았다. 자신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곱씹으며 가지런히 늘어선 장독들을 지나 본당으로 가 삼천 불단에 인사를 드렸다.

 

서운암 선원, 2017년 가을

 

본당을 나와 선원(禪院)으로 들어갔다. 파란 잔디가 깔린 선원 주위로 대나무 숲이 바람에 일렁인다. 1998년부터 문을 연 서운암 선원에는 통도사 스님은 물론 전국에서 모인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고 있다. 대중에게 미처 알려지지 않은 서운암에 숨어 있는 수행도량으로서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다. 정갈한 선원 주변으로 속세와 경계라도 하듯 둘러쳐진 기와 담벼락 너머로 다시 장독들이 보인다.

 

선원을 나와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장경각으로 오르는 동안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을 만끽한다. 중간지점 서운암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등이 굽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찾는 이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소나무 아래에 서면 햇살 아래 반짝이는 장독들과 자연 속에 파묻힌 암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 장경각으로 향한다.

 

서운암 장경각에서 본 전경, 2017년 여름

 

장경각이 있는 언덕에서 바라다보는 풍경은 가위 장관이다. 영축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울산까지 내다보인다. 산문에서 통도사 본사, 그리고 이곳까지 걸어온 길을 눈으로 되짚고 나서야 걸음을 장경각으로 옮겼다.

 

입구에 들어서자 뜨거운 불과 인고의 시간으로 빚어낸 십육만도자대장경이 마치 미로처럼 놓여 있다. 장경각을 나올 때까지 이어지는 대장경은 단지 차가운 흙과 돌이 아니라 뜨거운 염원이 가득한 생명으로 다가와 신비로울 따름이다. 먼 옛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장경각에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장경각을 조성하면서 내부 전체에 옻칠을 했다. 옻은 주로 목재 위에 덧발라 광택을 내는 최고의 보존재 가운데 하나다. 십육만도자대장경을 보관하는 곳이니만큼 더욱 세심한 배려를 한 셈이다. 장경각을 보존하려고 3톤가량의 옻을 사용했다. 국내에서 보통 30년 동안 생산한 양에 맞먹을 정도라고 한다. 성파 스님에 이어 감원을 맡은 동진 스님은 옻을 이용해 장경각 단청도 꾸밀 계획이라고 말했다. 민족통일 염원을 담은 곳을 보다 의미 있게 지켜가고 싶다는 바람이다.

 

서운암 선원, 2017년 가을

 

무심결에 스쳐 지나면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서운암 곳곳 지천으로 피고 지는 들꽃에도, 늘 찾는 이들을 무심히 반기는 장독들도, 법당을 메운 삼천불의 가르침도, 처음부터 제자리인양 장경각을 지키는 도자대장경 모두 기다림없이 만날 수 없는 것들이다.

 

겨우내 찬바람을 이겨내고 봄이면 오색찬란한 색으로 세상을 물들이는 들꽃에서, 햇살과 비바람 속에 자신을 버리고 본래 제 맛을 찾아가는 장들에서, 뜨거운 불길 아래 굵은 땀방울과 함께 밤낮을 보내야만 형태를 갖추는 도자 불상과 대장경 모두 인고의 시간이 피워낸 아름다운 선물이다. 서운암을 찾는 많은 이들이 그 선물의 의미를 한 번쯤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다시 장경각에서 암자로 내려가는 걸음에 붉은 금낭화가 반긴다. 서운암을 상징하는 꽃인 금낭화의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한다. 땅을 향해 고개 숙인 모습은 겸손과 순종을 의미한다. 세상 아무리 작은 것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서운암과 어울리는 꽃말이다.

 

그 가르침에 따라 서운암은 또 다른 불사를 준비하고 있다. 동진 스님은 장경각 옻 단청과 함께 사찰에서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불화 32165점 모두 옻을 이용해 천연의 아름다운 색으로 풀어내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옻을 이용한 불화는 특별히 윤기가 나고 투명하기 때문에 다른 안료와 섞어도 고유한 여러 가지 색을 그대로 낼 수 있다. 또한, 오랫동안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2018년 완성을 목표로 이뤄지는 이번 불사 역시 그동안 서운암이 지켜온 전통에 대한 가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무심하게 지켜봐 온 서운암의 숨은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산길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다시 암자 입구에 멈춰 섰다. 곧 뜨거운 여름이 다가오면 자그마한 영지(影池)에 아기자기한 어리연꽃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진흙 속에서 누구보다 고결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어지러운 세상, 진정한 자신을 찾는 일이 전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암자 순례를 이어간다.

 

>>>사명암, 불교 예술의 참맛을 보다

 

이 글은 양산문화원 위탁을 받아 진행한 통도사 암자 순례책자 발간 사업에 제가 취재수록한 내용을 양산문화원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모든 저작권은 양산문화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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