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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로 유명한 옥련암은 주말이면

물을 길러오는 이들로 늘 분주한 곳입니다

 

또한, 옥련암 감원 스님의 독특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큰빛의집'은 대개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한자 편액이 아니라

한글 편액으로 돼 있어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무형문화재인 장인이 직접 조각한

천이백아라한상은 반드시 봐야할 옥련암의 자랑입니다

 

옥련암 '큰빛의집', 2017년 여름

 

옥련암, 깨달음의 다양한 세계를 엿보다

 

사명암을 나와 다시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언덕길이 시작하는 곳에서 잠시 걸음을 옮기니 옥련암(玉蓮庵)과 백련암(白蓮庵)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섰다. 어느 암자를 먼저 둘러볼까 고민하다 목이 마르다는 생각에 먼저 옥련암을 찾기로 했다. 언덕을 오르다 보니 숲 속에 정성으로 쌓아올린 돌탑 세 개가 솟대처럼 길목을 지키고 있다.

 

옥련암 입구에 들어서자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나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약수가 나오는 곳에 차를 세워두고 큰 물통에 약수를 담아 싣는 모습은 옥련암을 찾을 때면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깨끗하고 물맛이 좋아 평일이건 주말이건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옥련암 장군수

 

옥련암 약수는 장군수(將軍水)라고 불린다. 장군수라고 불리게 된 사연은 양산지역 출신인 조선시대 이징옥 장군과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징옥(李澄玉) 장군은 하북면 삼수리 출신으로 세종 때 북방 6진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형인 이징석(李澄石)과 동생인 이징규(李澄珪)도 경상도와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 등을 지내 3형제가 모두 무장(武將)으로 이름이 높아 삼장수(三將帥)라고 부른다.

 

현재 장군 고향인 하북면 삼수리에는 생가터 복원이 추진되고 있고, 2014년엔 이징옥 장군을 주제로 한 뮤지컬을 양산시가 제작해 공연하고 있다. 또한, 해마다 10월 양산 삽량문화축전에 삼장수 춤이라는 이름으로 단체군무를 지역주민들이 선보이는 등 양산지역 역사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이징옥 장군과 옥련암의 인연은 장군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려서부터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무용(武勇)이 뛰어난 장군은 옥련암에서 수련을 쌓았다고 한다. 옥련암 약수를 마시며 수련을 쌓은 장군이 훗날 큰 업적을 이룬 밑바탕이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옥련암 약수를 장군수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옥련암 스님들 역시 이 약수 때문에 다른 암자에 있는 스님보다 힘이 셌다고 전한다.

 

이징옥 장군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옥련암은 오랜 역사를 가진 암자다. 역사에 남아 있는 기록을 살펴보면 1374(고려 공민왕 23)에 쌍옥대사(雙玉大師)가 창건한 후 1857(철종 8)에 호곡(虎谷), 청진(淸眞) 선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특히 옥련암은 근대 불교의 효시라고 부르는 구하 스님이 수행 끝에 1905년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른 곳이기도 하다.

 

心塵未合同歸宿(심진미합동귀숙)

마음에 티끌이 따로 없어

그와 같이 존재하고

 

五體投空空歸依(오체투공공귀의)

오체를 공중에 던지니

함께 귀의한다네.

 

-구하 스님 오도송

옥련암, 2017년 가을

 

  전하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시원하게 물 한 사발 들이키고는 옥련암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서니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이고 그 위에 소나무 두 그루가 찾는 이를 반기듯이 허리를 숙이고 있다. 마치 손으로 감싸듯 서 있는 소나무가 일주문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계단 아래에는 부처의 위엄을 나타내는 사자 상이 나란히 암자 입구를 지키고 있다. 최근과 같은 모습으로 암자를 중건한 것은 현재 감원인 법선 스님이 1988년부터 옥련암을 맡으면서 새롭게 불사한 것이다.

 

그런데 계단 너머로 보이는 법당 편액이 예사롭지 않다. ‘큰빛의집이라고 쓰여 있는 한글이 낯설다. 보통 암자에는 한문으로 쓴 편액이 걸려 있기 마련인데 한글로 써 놓은 편액이 흥미를 끌었다. 법선 스님이 법당을 중창하면서 한글 편액을 내건 이유는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아이들도 법당을 찾아 쉽게 알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옥련암 본당인 큰빛의집을 한자로 풀이하면 대광명전(大光明殿)으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신 곳이다.

 

옥련암 '큰빛의집' 내부

 

비로자나불은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로 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을 한 법신불(法身佛)을 말한다.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 손 모양)을 지권인(智拳印)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 등 다른 불상의 수인과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두 손 모두 엄지손가락을 손안에 넣고 주먹을 쥔 다음,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서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왼손 집게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는 손 모양인데 오른손은 부처를, 왼손은 중생을 상징한다. 따라서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큰빛의집 안으로 들어서니 비로자나불 좌우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함께 모셔져 있다. 그런데 여느 법당과 달리 불단 뒤편에 탱화 대신 목재로 만든 조각상이 가득하다. 불단 뒤편뿐만 아니라 제각각 표정과 몸짓을 한 목조각상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느 것 하나 같은 생김이 없다.

 

옥련암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난 표지석이 떠올랐다. 옥련암이라는 이름 옆에 천이백아라한전이라는 글귀를 함께 새겨 놓았다. 본당 안에 있는 목조각상들은 천이백아라한(千二百阿羅漢)을 하나하나 묘사한 것이다. 아라한은 나한(羅漢)이라고도 하는데 불제자들이 도달하는 최고의 계위(階位)를 일컫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은 불제자를 의미한다.

 

천이백아라한을 묘사한 목조각상 뿐만 아니라 신중단에 모신 신중탱화 역시 목조각으로 돼 있다. 당장에라도 불법을 수호하려고 뛰쳐나올 것만 같은 호법신(護法神)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본당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처마 아래 다양한 모습을 한 목조각상을 배치해 눈길이 끈다. 큰빛의집에 있는 목조각상은 무형문화재 제108호 박찬수 목조각장이 26개월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박찬수 목조각장은 특히 목조불상 제작에 남다른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장인 정신으로 완성한 수많은 목조각상에 둘러싸여 있자니 깨달음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온다는 말이 떠올랐다.

 

옥련암 천이백아라한상

 

큰빛의집을 나와 오른편을 보니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원래 옥련암에는 무량수전이 현재 큰빛의집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법선 스님이 중창하면서 큰빛의집을 짓고 그곳에 있던 무량수전을 예전 모습 그대로 왼편으로 옮겼다.

 

스님이 머무는 요사채 앞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것은 반송(盤松)이라고 부르는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땅에서부터 여러 갈래 줄기로 나뉘어 마치 부채를 펼친 모양으로 자란다. 중생의 모든 것을 듣고, 보며 보살피라는 의미가 있는 관세음보살의 팔들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옥련암 반송

 

예사롭지 않은 법당 편액과 목조각상들을 보며 법선 스님이 어떤 분일까 궁금해졌다. 법선 스님은 출가 전 젊은 시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전도사 출신일 정도로 독실했던 스님은 사병으로 군 복무 시절, 장교들과 군목을 설득해 건축헌금을 받아 군대 내 교회를 건립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은 공부를 위해 어느 절에 묵고 있을 때였다. 절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손에서는 성경을 놓지 않고 있던 스님은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을 느꼈다. 절에 있던 스님들 눈에 띌까 조심하며 성경을 가지고 다니곤 했는데 어느 날 한 스님이 개의치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순간 스님은 자신은 물론 기독교가 가진 편협함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불교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출가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20176월 스님은 군 법당 설립을 위해 2억 원을 후원금으로 내놓으면서 교회 건립도 했는데 칠순을 넘은 지금까지 군법당 불사는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청년 장병에게 불연(佛連)을 심어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스님의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들으니 법당 편액을 한글로 쓴 까닭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옥련암 입구 돌탑

 

옥련암 아래 텃밭도 여느 암자보다 규모가 크다. 300평이 족히 넘을 듯한 텃밭에는 다양한 작물이 자라고 있다. 옥련암은 산내 암자 가운데 고시생을 받는 암자다. 법선 스님이 출가 전 공부를 위해 절과 맺은 인연 탓인지 모르겠지만 암자 아래 건물에서 많은 이들이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옥련암 공양은 맛이 좋기로 소문나 있다. 텃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를 이용해 반찬을 만들고, 스님이 아침마다 제일 먼저 반찬을 챙길 정도로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가 깊다. 스님의 정성과 맑은 장군수, 멀리 보이는 영축산 봉우리에서 전해지는 좋은 기운이 옥련암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앞으로 좋은 일만 가져다줄 것 같다.

 

>>>백련암, 깨달음의 스승 앞에서 나를 찾다

 

 

 

이 글은 양산문화원 위탁을 받아 진행한 통도사 암자 순례책자 발간 사업에 제가 취재수록한 내용을 양산문화원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모든 저작권은 양산문화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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