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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암자순례, 그 첫 번째 순례의 마지막은 '백련암'입니다
백련암은 오랜 수행의 기풍을 간직한 조용한 암자입니다
가을이면 노란빛으로 물든 오랜된 은행나무가
찾는 이를 먼저 반깁니다
통도사 염불원으로 소임을 다하는
백련암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백련암 가는 길, 2017년 여름
백련암, 깨달음의 스승 앞에서 나를 찾다
옥련암을 나와 언덕을 내려가다 길옆 돌탑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돌탑에 생명이라도 불어넣듯 그림자를 비추며 아른거린다. 다시 내리막을 걷다 옥련암과 백련암(白蓮庵)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섰다.
백련암 방향을 바라보니 깊은 숲길 너머에 시간이 고요하게 멈춰 있는 것만 같다. 백련암이라고 쓰여 있는 비석에는 백련정사(白蓮精舍)라는 이름이 함께 있다. ‘정사’(精舍)는 신앙에 따라 수행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인도 중부 마가다국 가란타 마을에 세워진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사찰의 효시라고 한다. 끊임없는 수행과 배움이 있는 암자려니 속으로 생각하며 첫 순례길 마지막 암자인 백련암으로 향했다.
백련암은 다른 암자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왠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길 탓인지 적막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가는 도중 “1996년 7월 26일 벼락 맞은 나무”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이고 밑동만 남은 전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언덕길을 오르다 주차장 앞에 도착하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남긴 한시(漢詩)를 한글로 풀어 커다란 비석에 새겨놓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백련암 입구, 2017년 여름
비석 뒤편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쓰여 있다. 백련암을 찾은 이 모두 마음을 비우고 부처에게 귀의하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암자를 바라보니 가장 먼저 족히 수백 년은 됨직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언덕에 우뚝 서 있다.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고 가을이면 노란빛으로 물드는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 수행처로 자리를 지켜온 백련암 역사를 웅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백련암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 월화대사(月華大師)가 창건하고, 1634년(인조 12) 현암대사(懸岩大師)가 중건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부터 선풍(禪風)이 뛰어난 선원(禪院)으로 환성, 경허, 만해, 운봉, 향곡, 구산 등 우리나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큰 스님들이 수행한 곳이다.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주석했고, 조선 중기 화엄학 일인자로 일생을 강설과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환성(喚醒) 스님도 이곳에서 수행했다. 이 같은 사실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해 성보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사명당 진영과 환성당대화상 진영(喚惺堂大和尙 眞影)이 뒷받침한다. 또한, 1901년 경운 스님은 이곳에서 백련암 정진 스님 부친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일자일배(一字一拜) 끝에 금니법화경(金泥法華經)을 쓰기도 했다. 금니법화경 역시 경남 유형문화재로 성보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만해 스님은 이곳에서 불교대전을 집필했다. ‘불교대전’은 만해 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고 1912년부터 이곳 백련암에서 ‘고려대장경’ 1,511부 6,802권을 낱낱이 열람하고 그 가운데에서 1,000여 부의 경ㆍ율ㆍ론으로부터 중요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한마디로 ‘축소판 팔만대장경’이라 할 수 있다.
1937년 성철 스님은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은 후 이곳에서 동안거를 보냈다. 그리고 이 시절은 구하, 경봉 스님과 같은 통도사 큰 스님들이 통도사 선원에서 선지(禪旨,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펴서 알림)를 드높일 때다. 성철 스님이 다음해까지 두 차례나 이곳에서 동안거를 보낸 것은 통도사가 자장율사 창건 이래로 계율정신을 오롯이 지켜온 불보사찰(佛寶寺刹)이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백련암에 걸음 한 것은 백련암이 가진 역사적 배경을 고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대강백(大講伯)이었던 탄허(呑虛) 스님은 이곳으로 와 강원(講院, 불전을 공부하는 교육 기관)을 개설하기도 했다.
백련암을 거쳐 간 수많은 고승의 숨결이 암자 곳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졌다. 계단을 오르자 은행나무 왼편으로 강선루(講禪樓)라는 편액이 달린 2층 건물이 서 있고, 계단을 오르면 백련사(白蓮舍)라는 편액이 걸린 법당이 보인다. 그리고 맞은편엔 영월루(影月樓)라는 편액이 보인다. 백련암 누각은 앞과 뒤에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셈이다. 정갈하게 깔린 자갈마당에는 오후 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앉고 있다.
백련암, 2017년 가을
백련암을 지금 모습으로 중건한 것은 감원인 원산 스님이 1995년 백련암을 맡으면서부터다. 처음 원산 스님이 백련암을 오게 된 것은 은사였던 경봉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암자 살림을 맡게 되자 이런저런 일들이 자꾸 생기면서 마음먹었던 수행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3년 동안 낡은 누각을 정비해 법당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광명전(光明殿)을 지었다. 그리고 옛 스님들이 정진했던 곳으로 보이는 토굴을 발견하고, 토굴 주변 대나무 숲을 정리한 후 요사채를 지어 죽림굴(竹林窟)이라고 했다.
죽림굴이 마련되자 스님은 스스로 빗장을 걸어 잠근 채 무문관(無門關) 수행에 들어갔다.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과 도구만을 가지고 깨달음을 얻고자 스스로 외부와 출입할 수 있는 문을 닫아버렸다.
1998년 2월 시작한 수행은 하루 한 끼 공양만으로 버티며 은산철벽(銀山鐵壁) 앞에 자신을 세운 지 3년이 지나서야 끝을 맺었다. 2001년 3월 스님이 무문관 수행을 마치고 나오던 날, 백련암은 스님을 만나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3년 만에 스스로 닫았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스님이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아무 말 없이 다시 문을 닫고 죽림굴로 들어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무문관 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듣고자 모인 사람들에게 무언설법(無言說法)을 펼친 스님의 참뜻은 아마 ‘직접 수행에 임하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행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일은 다른 누군가 대신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무언(無言)으로 알린 셈이다.
백련암 무문관
수행을 마친 스님은 다시 불사를 이어갔다. 수행에 들어가기 전 미리 마련해둔 목재는 3년이란 시간 동안 충분히 건조돼 훌륭한 법당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다. 스님과 함께 목재 역시 수행 기간을 거친 셈이다.
백련사(白蓮舍)라고 쓰여 있는 본당은 원래 옛 선방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아미타불만 불상으로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보살로 불단을 구성하고 있다. 불단 왼편에 신중단과 영가단이 함께 있다. 벽면 한쪽에는 원산스님 초상이 걸려 있다.
백련사 오른쪽엔 명월선원(明月禪院)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경봉 스님이 선방을 운영하겠다는 제자 원산 스님에게 직접 써준 글이다. 스님은 ‘명월’이라 이름 붙인 것은 당신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붙여진 것이라는 농을 건네기도 했다. 과거 백련암 백련선원은 1935년 개원해 석봉 스님을 비롯한 스님 16명이 정진했으며, 1942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만 현재는 운영하고 있지 않다.
백련암 은행나무
하지만, 백련암은 사실상 통도사 염불원(念佛院) 역할을 현재 담당하고 있다. 2008년 11월 12일 백련암에서는 ‘만인동참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입재법회를 가졌다. 만일(萬日) 동안 이어지는 염불 수행의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만일염불회는 매일 사분정근(四分精勤) 때마다 염불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백련암은 수행 기간 중 모금한 동참액 전부를 청소년 불교문화회관 불사금으로 기부할 계획이다.
‘만일’이라는 시간은 햇수로도 27년이 넘는 시간이다. 원산 스님이 만일염불회를 시작한 것은 참선수행을 하기 어려운 재가불자들이 염불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다가가는 것을 돕기 위함이다. 수행 방식이 아니라 수행 그 자체에 의미를 둔 셈이다.
백련암 만일염불회 전통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백련암 옛 누각에는 ‘백련정사 만일승회기’(白蓮精舍 萬日勝會期)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백련정사 만일승회기에는 “1600년 전 동진시대 혜원법사가 여산 동림사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해 123명이 깨달음을 얻었고, 신라의 발징 화상은 강원도 건봉사에서 만일염불회를 창설해 31인이 허공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은 눈여겨본 스님은 만일염불회 결성 원력을 세우며 ‘백련암’을 ‘백련정사’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옛 백련결사에서 염불도량으로써 백련암의 시작을 본 것이다.
백련사를 마주 보는 영월루는 본당을 불사하기 전까지 원래 법당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지금은 법회나 강연을 하는 공간이지만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그런데 아미타불 뒤편 탱화에는 석가모니불이 그려져 있다. 이 후불탱화는 ‘통도사 백련암 동치 2년 석가모니후불탱화(通度寺 白蓮庵 同治二年 釋迦牟尼後佛幀畵)’로 조선시대 불교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원본은 성보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영월루에 있는 것은 탁본이다.
통도사 백련암 동치 2년 석가모니후불탱화
중앙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악마를 항복하게 하는 손가락 모양으로,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내리어 땅을 가리키는 모습)의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 각각 3단으로 나눈 구도다. 가장 아래쪽 좌우에 협시보살상과 사천왕상, 바로 위쪽에는 8대 보살상이 좌우 4구씩, 가장 위쪽에는 16 나한상과 신장상이 좌우로 배치돼 있다. 후불탱화와 함께 경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신중탱화 역시 호법신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영월루에서 나와 언덕 위에 있는 광명전을 바라봤다. 광명전으로 오르는 길 왼편에 감나무와 함께 보지 못한 나무 한 그루가 마치 용이 승천하듯 하늘 위로 가지를 뻗어 올리고 있다. 백련암 은행나무와 함께 수백 년 동안 암자를 지켜온 모감주나무다. ‘무환자(無患子) 나무’, ‘염주나무’라고도 불리는데 가을이면 은행 알 만한 열매가 익어 떨어진다. 그 속에 까만 구슬 같은 단단한 씨앗을 ‘무환자’라고 부르는데 이것으로 염주를 만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근심 없는 나무, 즉 무환자(無患子)라는 의미에 어울리는 용처인 셈이다.
백련암 광명전, 2017년 가을
광명전에 올라 아래로 보이는 백련암 풍경을 저물어가는 햇살과 함께 눈에 담았다. 좌우로 은행나무와 모감주나무가 마치 금강역사처럼 암자를 수호하고 있는 듯했다. 첫 통도사 암자 순례의 마지막 암자로 백련암을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 의연하게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에게 전파한 고승들의 자취가 암자의 기품으로 녹아있다.
백련암을 나서기 전, 원산 스님이 무문관 수행을 했던 죽림굴을 마지막으로 둘러봤다. 여전히 외부 출입을 삼가야 하는 듯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입구에 서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자신을 몰아 놓고 깨달음을 구한 스님의 뜻을 헤아려보려 어리석게 애써 본다.
백련암을 지키는 은행나무와 떠나는 이에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처럼 보이는 비석에 새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번갈아 보며 경허 스님이 백련암을 보고 남겼다는 선시(禪詩)를 입으로 되뇐다. 저물어가는 햇살을 몸으로 느끼며 첫 순례를 마치고 산문으로 향하는 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호방한 마음 가눌 길 없어 宕情收未了(탕정수미요)
긴 소맷가락 떨치며 천 언덕을 넘었네 長袖拂千岑(장수불천잠)
숲 깊은 절에 들리는 두견새 울음소리 深院聽鵑語(심원청견어)
강산의 만고심인저 江山萬古心(강산만고심)
-경허 스님 ‘통도사 백련암’
광명전에서 바라본 백련암, 2017년 겨울
>>>⑨안양암, 마음의 눈으로 극락세계를 보다
※이 글은 양산문화원 위탁을 받아 진행한 ‘통도사 암자 순례’ 책자 발간 사업에 제가 취재ㆍ수록한 내용을 양산문화원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모든 저작권은 양산문화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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