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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축암은 관광객에서 알려진 암자는 아니다.

통도사 산내암자 가운데 비교적 가장 최근에 지은 암자로

이곳에는 부처님의 법을 공간에 구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일반 대중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암자다.

 

서축암, 2017년 가을

 

서축암, 깨달음의 말씀으로 세상을 비추다

 

안양암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며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영축산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둘러본 통도사 산내암자들이 영축산 자락 아래에 있었다면 이제 영축산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암자들을 둘러볼 차례다.

 

영축산 산세는 어머니처럼 넓은 산자락에 통도사와 암자들을 품고 있으면서도 우뚝 솟은 산맥은 사시사철 세상 풍파를 막아줄 것 같은 아버지 뒷모습과 닮았다. 첫 번째 순례에서 만났던 암자들과 안양암이 어머니 치맛자락 같은 능선 사이사이에 놓여 있다면 앞으로 만날 암자들은 인자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버지 허리 부근 산자락에 있다. 그리고 비로암(毘盧庵)과 백운암(白雲庵)은 허리 위로 훌쩍 넘어선 곳까지 올라가 있다.

 

통도사 연꽃단지, 2017년 여름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좌우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편 오르막길로 접어들어 조금 더 가면 곧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내리막을 한참 걸어가다 왼편에 연꽃단지가 보인다. 통도사 스님들이 차를 만들려고 조성한 곳이다. 통도사 연잎 차는 카페인과 탄닌이 적고 철분 함량은 많아 남녀노소뿐 아니라 임산부에게 약으로도 손색이 없다. 찻잎을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말리는 구증구포방식으로 제작한다. 비단 통도사는 연잎 차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다도(茶道)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영축산 자락에 자생하는 야생 차 탓에 스님들이 다도를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이곳은 1년 중 가장 뜨거운 시기인 8월이면 진흙에서 꽃을 피우는 연꽃들이 파란 하늘 아래 자유롭게 일렁인다. 운치 있는 원두막까지 더해져 연꽃단지는 추억을 남기려고 찾는 이들로 붐비기 마련이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란 말처럼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맑고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 세상을 정화한다는 뜻은 연꽃의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연꽃단지를 지난 후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삼거리가 있다. 그곳 나무 그늘에는 산나물 따위를 파는 할머니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지날 때면 늘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할머니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정면에 보이는 영축산 방향으로 걸었다. 길 따라 펼쳐지는 너른 들판이 반갑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어 고개 숙인 벼와 파란 하늘 그리고 영축산이 어우러져 고요한 풍경을 만든다.

 

통도사 황금들판, 2017년 가을

 

들판을 따라 걸으면 다시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은 자장암(慈藏庵) 방면이고, 오른쪽은 반야암(般若庵)으로 가는 길이다. 곧장 앞으로 걸으면 비로암으로 이어진다. 이번에 순례할 암자들이 세 방향으로 나뉘어 있다. 우선 자장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길에는 서축암(西鷲庵)과 금수암(金水庵), 자장암이 있다.

 

잠시 후 서축암이 보인다. 큰길 바로 옆에 있는 서축암은 세심교(洗心橋)를 지나면 만날 수 있다. 늘 활짝 열려 있는 문 앞에 서면 파란 잔디 위에 가지런히 두 줄로 서 있는 번(, 부처와 보살의 위덕을 나타내고 도량을 장엄, 공양하려고 사용하는 깃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번에는 순서를 나타내는 번호와 한자 그리고 이를 풀어낸 글귀가 적혀 있다.

 

서축암 법성게

 

서축암 마당에 세운 번들은 화엄경 법성게(華嚴經 法性偈)를 한 구씩 담고 있다. 법성게는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지은 것으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수록된 730210자 한문으로 지은 게송(偈頌, 불교적 교리를 담은 한시)의 한 형태이다. 내용은 한 마디로 불교에서의 법(), 즉 진리의 세계를 압축해 표현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자신의 수행 완성에 관한 것과 다른 이의 수행을 어떻게 이롭게 하느냐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행 방편과 수행 공덕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불교의 가장 심오한 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弗華嚴經)을 함축한 셈이다. 서축암을 찾는 이 모두 화엄경의 진리를 쉽게 접하라는 뜻인 것 같다. 자세히 보니 본당 방향과 입구 방향 모두 한 번씩 법성게를 볼 수 있도록 번을 배치해놓았다.

 

서축암 역사는 길지 않다. 1996년 월하 스님을 모시려고 한 보살이 논이었던 부지를 사들여 암자를 세웠다. 하지만, 통도사 방장을 지낸 월하 스님이 200312월 입적하면서 보살의 염원처럼 스님을 모시지는 못했다. 그 뒤 감원인 우진 스님이 암자를 맡으면서 불제자를 위한 교육도량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진 스님은 통도사승가대학 강주(講主)를 역임한 대표적인 강백(講伯)이다. 서축암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번을 통해 스님이 암자를 어떻게 운영하고 싶은가를 잘 헤아릴 수 있다. 오랜 세월 경전을 연구하고 불제자에게 진리의 말을 가르쳐온 스님이 법성게를 적은 번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깨달음 역시 배움에서 나온다는 의미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스님의 마음을 짐작해본다.

 

스님이 번에 남긴 법성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번이 끝나는 곳에 있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서축암 본당이다. 편액은 월하 스님의 글씨다. 본당은 인법당(因法堂) 형태로 구성돼 있다. 다만, 아미타불을 모신 불단과 스님의 공간을 구분하고자 공간을 복도로 잇고 있다. 불단에는 황금빛을 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뒤로도 황금빛 찬연한 후불탱화가 놓여 있다.

 

서축암 무량수전

 

그리고 벽에는 화엄경 내용을 묘사한 변상도(變相圖, 불교 경전 내용이나 그 교의를 알기 쉽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가 그려져 있다. 변상도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보면 심오한 화엄경의 내용을 풀어가고 있다. 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 내용을 쉽게 이끄는 친절함이 돋보인다.

 

불단을 벗어나 복도로 나오니 햇살이 가득 비친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길을 주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부터 따뜻해져 온다. 밖으로 나와 다시 잔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번들을 바라봤다. 서축암은 통도사 산내 암자 가운데 가장 평평한 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주변에 큰 숲들이 없어 온종일 양지바르다. 그만큼 따뜻한 햇볕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당으로 나와 이번엔 거꾸로 번에 적힌 법성게를 읽어 내려갔다. 왼편으로 멀리 영축산이 보인다. 영축산을 배경 삼아 다보탑이 우뚝 서 있다. 그리고 다보탑 아래 샘터에 약수가 쏟아지고 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약수 앞에 서서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마음속 염원을 담아 영축산과 어우러진 다보탑을 한 바퀴 돌았다.

 

서축암 다보탑과 영축산, 2017년 가을

 

흔히 다보탑(多寶塔)이라 하면 불국사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보탑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줄여서 법화경에 따르면 부처가 영산(靈山)에서 이 경을 설파할 때 다보탑이 땅 밑에서 솟아나오고, 그 탑 속에서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의 법화경 설법을 찬탄하고 증명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다보여래(多寶如來)는 석가모니 이전 과거불이며, 영원히 살아 있는 본체로서의 부처인 법신불이다. 보살로 있을 때 내가 성불해 멸도한 뒤에 시방세계에서 묘법연화경을 설하는 곳에는 나의 보탑이 솟아나와 그 설법을 증명하리라하고 서원했다. 석가여래가 영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할 때 땅속에서 다보여래의 탑이 솟아났고, 그 탑 가운데서 소리가 나와 석가여래 설법이 참이라고 증명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다보탑의 유래다.

 

다보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석탑과 달리 그 모양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다. 다보탑 모양 역시 묘법연화경 견보탑품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때 부처님 앞에는 칠보의 탑이 있었는데, 그 높이가 500유순이며 사방 길이가 250유순이었다. 땅에서 솟아나서 공중에 머물고 있으며 가지가지의 보물로 장엄했으니 5천의 난간과 천만이나 되는 방과 수없는 당번(幢幡)으로 장엄하게 꾸몄으며, 보배 영락을 드리우고 탑 위에는 만억의 보배 방울을 달았으며, 사면에서는 다마라발전단의 향기가 세계에 두루 차고, 여러 번개(幡蓋)는 금유리차거마노진주매괴 등의 일곱 가지 보배로 이뤄져 그 높이가 사천왕의 궁궐까지 이르렀다.

- 묘법연화경 견보탑품(妙法蓮華經 見寶塔品) 가운데

 

다보탑 뒤에 솟아 있는 영축산을 바라보며 부처가 설법했다는 영산이 바로 이곳 영축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보탑 하면 쉽게 불국사를 떠올리지만 오히려 영축산 아래 있는 서축암 다보탑이 그 자리를 제대로 찾았다는 생각도 함께했다. 원래 서축암 다보탑은 본당과 입구를 잇는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탑 높이가 본당보다 높아 보여 지금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영축산과 한 눈에 들어오는 지금 위치가 더 나아 보인다.

 

다보탑까지 둘러보니 갑자기 빛줄기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 가지런히 자리 잡은 번은 화엄경(華嚴經)의 이치를 알리고 있고, 영축산 아래 우뚝 서 있는 다보탑은 법화경(法華經)의 깨달음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불교 양대 경전인 화엄경과 법화경이 한 공간에 머무르며 대중에게 깨달음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출가 후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경전을 연구해온 우진 스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서축암 구석구석을 환히 밝히는 햇빛처럼 깨달음의 말씀이 대중의 어두운 마음 구석까지 밝혀주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서축암 불교대학 '향성불학원'

 

서축암은 일반 대중에게 깨달음의 말씀을 전하고자 불교대학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향성불학원이라고 하는 경전 강좌는 매주 두 차례 화엄경을 가르치고 있다. 본당에서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작은 문이 보이는데 그곳을 지나면 조립식 건물 한 채가 있다. 바로 우진 스님이 재가제자들을 대상으로 화엄경을 가르치는 곳이다. 원래 차를 생산하는 작업장으로 사용해오던 것을 강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강당 안에는 왠지 차 향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머리 위로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스님 뜻처럼 나가는 길에도 번에 적힌 법성게를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읽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 영축산과 다보탑을 눈에 담으며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순례를 이어간다.

 

서축암, 2017년 여름

 

>>>⑪금수암, 일상에서 수행의 의지를 엿보다 

 

 

이 글은 양산문화원 위탁을 받아 진행한 통도사 암자 순례책자 발간 사업에 제가 취재수록한 내용을 양산문화원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모든 저작권은 양산문화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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