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극락암은 통도사 암자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암자입니다

하지만 화려한 모습에 취해 정작

극락암이 간직한 깨달음의 세계를 놓칠 때가

더 많은 지 모릅니다

 

'해우소'라는 말을 만든

경봉 스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극락암으로 떠납니다

 

극락암, 2017년 봄

 

극락암, 화엄 세계의 빗장을 열다

 

이제 영축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영축산 산세를 올곧은 자세로 허리를 펴고 좌정한 부처의 모습과 비유한다면 지금까지 둘러본 암자들은 무릎과 허리 부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축산 깊은 곳에 있는 극락암과 비로암은 단전(丹田)에 해당하는 암자고, 백운암은 심장에 가까운 곳에 있다.

 

반야암에서 나와 극락암으로 가는 길 앞에 섰다. 푸른 솔밭이 눈 앞에 펼쳐진다. 무풍한송로 소나무들이 길을 껴안듯 가지를 뻗어 에워싸고 있는 느낌이라면 이곳 솔밭은 길을 수호하듯 하늘로 줄기를 뻗어 올리고 있다. 빽빽한 소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파란 하늘이 보이고 길 위에는 가지 사이를 통과한 햇살이 가야 할 걸음을 비춘다.

 

극락암으로 가는 솔밭길, 2017년 여름

 

극락암(極樂庵)의 봄은 화려하다. 꽃비를 뿌리는 벚꽃이 만발하는 시기면 극락암은 이름 그대로 극락에 와 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암자 입구에 있는 극락영지(極樂影池)와 홍교(虹橋)의 풍경은 봄이면 벚꽃과 함께 이곳을 찾은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벚나무 그늘에 쉬기도 하고, 홍교에 올라 멀리 영축산과 가까이 극락암 풍경을 즐기기 여념이 없다. 문득 홍교에 올라 영지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극락암 극락영지와 홍교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극락암의 본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극락암 유래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332(고려 충혜왕 2)에 창건됐다는 기록이 있지만, 창건자는 명확하지 않다. 이후 1758(영조 34) 지홍대사(智弘大師)가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감원인 명정 스님은 극락암을 새로 중건할 때 절터에서 신라 시대 기와와 유물들이 나온 것을 볼 때 그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암자라고 믿고 있다.

 

극락암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고승이 한 명 있다. 바로 한국 근현대불교를 대표하는 경봉(鏡峰) 스님이다. 스님의 일화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해우소(解憂所)와 휴급소(休急所)가 아닐까 싶다. 오늘날 사람들이 화장실을 돌려 말할 때 자주 쓰는 말은 바로 경봉 스님이 만든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난 뒤 경봉 스님은 휴급소에 가서 다급한 마음 쉬어가고, 해우소에서 근심걱정 버리고 가면 그것이 바로 도를 닦는 거지라며 화장실에 이름을 붙여줬다. 하찮게 여기는 일상에서 도()를 닦고 수행할 수 있다는 스님의 말이 유쾌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준다.

 

스님은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되던 해 모친상을 겪자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6세 때 통도사 성해(聖海) 스님을 찾아 출가했다. 1908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고,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24월 해담(海曇)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 불경 연구에 몰두했다.

 

경봉 스님은 강원을 졸업 후, 하루는 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디 반 푼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종일수타보, 自無半錢分 자분반전분)”는 경구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참선공부를 하기 위해 내원사 혜월(慧月) 스님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여전히 마음속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했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 스님과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움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이곳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 눕지 않고 늘 좌선함) 하면서 정진을 계속했다고 한다.

 

극락암 삼소굴과 산수유

 

경봉 스님은 극락암에서 1925년 어려운 노인들을 보살피기 위해 만일염불회를 개설한 데 이어 1927년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를 극락암 무량수각에서 처음 시작했다. 현재 통도사 본사에서 주관하고 있는 화엄산림법회가 극락암에서부터 그 시작을 알린 셈이다. 낮에는 무량수각에서 화엄경 경문을 하고 밤에는 삼소굴(三笑窟)에서 정진하다 스님은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 방안에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춤추는 것을 보는 순간 그동안 품어왔던 의문 덩어리가 일순간에 녹아내렸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마음이 식은 후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경봉 스님이 남긴 오도송(悟道頌)은 스님이 정진하던 삼소굴 주련(柱聯)에 남아 있다.

 

내가 나를 바깥 것에서 찾았는데            

我是訪吾物物頭 아시방오물물두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도다           

目前卽見主人樓 목전즉견주인루

하하 이제 만나야 할 의혹 없으니           

呵呵逢着無疑惑 가가봉착무의혹

우담바라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는구나   

優鉢花光法界流 우발화광법계류

 

- 경봉 스님 오도송

 

고승의 깨달음을 감히 범인(凡人)이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주련에 남은 오도송을 눈으로 훑으며 그 뜻을 나름 짚어보려 애쓴다. 낮은 지붕에 흔한 단청조차 칠하지 않은 작은 전각인 삼소굴은 경봉 스님이 1982년 열반에 들 때까지 지내던 곳이다.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면 사람 몸 하나 겨우 뉠 만한 작은 공간의 방이 있다. 툇마루에 앉아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바라봤다. 햇살을 받아 생명력 가득한 극락암에서 유독 이곳 삼소굴만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삼소굴의 삼소는 세 사람이 웃는다는 의미로 호계라는 시냇가에 세 사람이 웃는다(虎溪三笑)’라는 말에서 따와 경봉 스님이 직접 지은 것이다. ‘호계삼소는 유교·불교·도교의 진리가 그 근본이 하나라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다. 중국 송나라 진성유(陳聖兪)가 지은 여산기(廬山記)에 나온다. 현재 삼소굴에 걸려 있는 편액은 조선 말 팔능거사(八能居士)로 전국에 명성을 날리던 서화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의 글씨다.

 

극락암에 와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삼소굴에서 정진한 스님은 1982년 시자(侍者, 큰 스님을 모시고 시중드는 스님)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라고 물어보니, 웃으며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게송(偈頌)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스님의 마지막을 지킨 시자가 바로 명정 스님이다. 명정 스님은 극락암 감원으로 삼소굴 옆 원광재(圓光齋)에 거처하고 있다. 스승은 떠났지만, 여전히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원광재 역시 석재 글씨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극락암 삼소굴

 

명정 스님은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그때 나이가 17. 하지만 1년 뒤 통도사에 온 큰 스님을 따라 길을 나서 이곳으로 왔다. 바로 경봉 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경봉 스님이 열반에 들 때까지 스님은 23년이란 시간을 함께했다. 스님은 스승이 자리를 비운 후 틈틈이 스승의 수묵집과 일지, 편지글 등을 엮어 세상 사람들에게 전했다. 스승이 불쏘시개로 버린 메모까지 하나 버리지 않고 꼼꼼히 챙겼다. 지금도 원광재에는 세상에 공개하지 못한 스승의 흔적이 가득하다. 특히 명정 스님은 스승이 1927127일부터 시작해 197642일까지 50년 세월을 남긴 일기를 정리해 삼소굴 일지를 출간했다. 삼소굴 일지는 스승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작업이었고 아울러 우리나라 불교의 더없이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삼소굴로 이끌리듯 발길을 옮기는 까닭은 봄이면 화사하게 피어나는 산수유 때문이다. 영지와 벚꽃의 풍경에 취한 걸음은 저도 모르게 산수유가 활짝 핀 삼소굴로 향하게 된다. 이곳 산수유는 1977년 명정 스님이 부산에 아는 지인을 통해 얻어 심었다. 산수유의 꽃말은 영원불변이다. 속세에서는 사랑을 맹세하는 꽃으로 알려졌지만 삼소굴 산수유는 변하지 않는 진리, 깨달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원광재에 있는 경봉 스님(오른쪽)과 명정 스님(왼쪽) 옛 사진

 

어리석은 걸음이 법당보다 삼소굴을 먼저 찾게 했다. 정신을 차리고 영지로 다시 내려가 극락암 첫 관문인 여여문(如如門)에서 마음을 다잡고 순례를 이어간다. 여여문은 금강경에 나오는 여여부동(如如不動)에서 나왔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한결같아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여여문에 걸린 편액은 경봉 스님이 직접 쓴 것이다. 경봉 스님은 시((((()까지 모두 두루 갖춰 오절(五絶)로 불렸다. 특히 스님의 선필(仙筆)은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썼다고 할 정도로 보통 사람이 도저히 읽기 힘든 독특한 필체를 가지고 있다. 마치 물처럼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기운이 느껴지는 스님의 글씨는 오랜 세월 스님을 모신 명정 스님만 정확하게 알아본다고 한다.

 

경봉 스님의 글씨는 바로 옆 영월루(瑛月樓)에도 남아 있다. 영월루 편액 옆에 걸린 정법안장(正法眼藏)이란 편액 역시 경봉 스님 글씨다. ‘깨달은 자는 올바른 부처의 가르침을 말한다는 뜻으로 진실하고 불편부당한 부처의 마음이 지혜의 눈으로써 일체 사물을 비춰 보고, 일체의 법을 갖추고 있다는 불법佛法의 진수를 의미한다. 비단 극락암뿐만 아니라 통도사 곳곳에서 경봉 스님의 글씨를 찾아볼 수 있다. 아쉽게도 영월루와 옆에 있는 여시문(如是門)은 올해부터 전체 개보수에 들어가 그 글을 볼 수 없었다.

 

극락암 무량수각(오른쪽), 수세전(가운데), 정수보각(왼쪽)

 

여여문을 지나 본당인 무량수각(無量壽閣) 앞에 섰다. 극락암이라는 편액 아래 무량수각 편액이 함께 걸려 있다. 무량수각을 중심으로 왼편에 수세전(壽世殿)과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는 정수보각(正受寶閣), 연수당(延壽堂)이 있고, 오른편에 원광재와 삼소굴이 있다. 뒤편으로 조사각(祖師閣)과 단화각(丹花閣)이라 부르는 독성각이 있다.

 

무량수각은 불단에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지만, 탱화에는 아미타불이 그려져 있다. 이 탱화는 문화재자료 제384호로 지정된 양산 통도사 극락암 도광원년 아미타후불탱(梁山 通度寺 極樂庵 道光元年 阿彌陀後佛幀)이다. 중앙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6대 보살과 범천·제석천·사천왕·아난·가섭존자를 배치하고, 상단부에는 용왕·용녀·팔금강·4위의 신중상 등을 대칭으로 배치하고 있다. 화기(畵記)에 나와 있는 도광원년(道光元年)1821년으로 조선 후기 작품이다. 무량수각에 걸려 있는 극락암 청동반자(極樂庵 靑銅飯子) 역시 문화재자료 제386호로 지정돼 있다.

 

무량수각을 나와 수세전으로 향했다. 수세전은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곳으로 북두칠성을 모시는 전각이다. 다른 암자에서는 보통 칠성각 또는 높여 북극전이라고도 한다. 수세전에는 치성광여래탱 1위와 자미대제 삼태육성탱 1, 칠원성군탱 7위를 포함해 모두 9위의 완품을 갖춘 극락암 칠성탱(極樂庵 七星幀)이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436호로 지정된 이 탱화는 왕실의 무사안녕과 수명장수를 축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극락암 조사각

 

무량수각과 수세전 뒤편으로 조사각이 보인다. 조사각에는 삽삼전(卅三殿)이란 편액이 함께 걸려 있는데 가섭존자(迦葉尊者)에서 중국 육조혜능(六祖慧能)까지 33위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이전에는 극락암 호국선원을 정수보각에 열었는데 현재 조사각을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평소에는 일반에 개방하지 않지만 해마다 음력 10월 그믐날 역대 조사를 기리는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극락암은 1953년 경봉 스님이 극락암 호국선원의 조실로 추대되면서 선원도량으로 명성을 얻었다. 화려한 풍광에 가려 일반인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여전히 한강 이남 제일 선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깨달음을 찾는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는 도량이다.

 

나반존자를 모시는 독성각에는 단화각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무량수전을 나와 원광재 방향으로 돌아가면 맑은 약수가 흐르는 산정약수터가 있다. 뒤편으로 작은 오솔길이 보이는데 따라나서면 단화각에 이른다. 단화각은 원래 전각 앞이 개방된 형태였는데 불자들이 기도를 올릴 때 비와 추위를 피할 수 있게 보수해 놓았다. 때문에 단화각이란 편액은 기도처 안으로 들어가 아래에서 봐야 볼 수 있다.

 

극락암 단화각 내부

 

단화각에서 내려와 원광재에 들러 명정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고령에 몸이 불편하신데도 손수 차를 내줬다. 방안은 스승인 경봉 스님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깨달음을 얻은 스승을 존경해 그 뒤를 따라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노스님에게서 신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스님은 다도(茶道)에 조예가 깊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녹차 한 봉지를 통째로 다관에 털어 넣고 우려 준다. 보기와 달리 희한하게도 떫지도 쓰지도 않은 오묘한 맛이 난다.

 

견성(見性), 즉 깨달음을 풀어내는 노스님의 말은 어렵다기보다 유쾌했다. 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특유의 화법에 귀를 쫑긋 세우고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다음 순례가 기다리고 있는 탓에 원광재를 나서려는데 글까지 얻었다. 다반향초(茶半香初), 차를 마신 지 반나절이 됐지만 그 향은 처음과 같다는 뜻인데 늘 한결같은 원칙과 태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은 셈이다.

 

삼소굴과 원광재, 2017년 여름

 

원광재를 나와 다시 삼소굴 툇마루에 잠시 앉아 극락암을 바라봤다. 푸른 잔디마당 너머로 무량수각이 보이고 그 아래 처음 마음을 뺏겼던 영지의 아름다운 풍광이 새삼스럽다. 진리는 영원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려는 듯 흐드러지게 핀 산수유가 바람에 향을 날린다. 비로암으로 향하는 길에 다시 홍교를 건너며 영지에 비친다는 영축산 그림자를 찾아봤다. 그리고 곧 뜨거운 여름이면 이곳에 연꽃이 진흙 속에서 생명을 가득 피우게 될 장면을 마음속에 그렸다.

 

극락암 극락영지에서 바라본 영축산, 2017년 봄

 

>>>⑮비로암, 산을 보고 물소리를 듣다

 

이 글은 양산문화원 위탁을 받아 진행한 통도사 암자 순례책자 발간 사업에 제가 취재수록한 내용을 양산문화원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모든 저작권은 양산문화원에 있습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