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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Story)는 말 그대로 이야기다. 이야기는 이를 전하는 사람과 그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을 화자라고 부르고, 등장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이를 주인공이라 부른다. 물론 이야기 속 주인공은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주인공은 동물일 수 있고, 음식일 수 있으며 심지어 공간일 수도 있다.
시민을 위한 도시스토리텔링(김태훈, 도서출판 피플파워, 2017년 6월 출판)
스토리텔링이란 말은 이야기를 만들고 전달하는 과정이다. 많은 도시에서 스토리텔링을 주목하고 행정에 접목하는 일은 새삼스럽지 않다. '도시 브랜드'라는 말 속에는 이미 스토리텔링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기업하기 좋은 도시, 따뜻한 복지 도시, 활력 넘치는 문화도시...
전국 지자체를 수식하는 슬로건은 대부분 스토리텔링 영향을 받은 도시 브랜드를 표현하고 있다. 도시 뿐만 아니라 개인 역시 입사지원서와 함께 제출하는 자기소개서에서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강요받고 있다.
'시민을 위한 도시스토리텔링(김태훈, 도서출판 피플파워, 2017년 6월 출판)'은 국가, 도시, 개인에게 불어닥친 스토리텔링 열풍을 분석하고 있다. 무엇보다 열풍 속 가려진 스토리텔링 본질이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도시 스토리텔링이 갖추어야 할 핵심이 무엇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도시 스토리텔링을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성스러운 이야기를 발견 또는 창조하고, 이를 도시 구성원을 결속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보급, 확산, 내면화하는 일체의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책을 시작하며 저자가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화자와 주인공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반드시 화자,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 속에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도시 스토리텔링 역시 화자와 주인공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고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각 도시에서 진행한 스토리텔링이 대부분 실패한 배경을 화자와 주인공 모두 도시의 주인이며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주로 지자체장 실적을 뒷받침하려 추진한 스토리텔링은 도시 구성원 모두에게 공감을 얻지 못한 채 짧은 수명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부분 도시에서 스토리텔링을 '마케팅' 측면에서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도시를 살아가는 구성원을 오히려 외면하는 결과마저 낳았다는 설명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역 축제를 들고 있다.
봄부터 겨울까지 전국은 일년내내 말 그대로 축제 중이다. 어느 도시도 축제를 발굴하고 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방식이나 규모는 천차만별이지만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명분 아래 대부분 축제 목표는 최대 수익을 얻는 것이다. 지역주민보다 관광객 유치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저자는 진주 유등축제 가림막 설치 사건을 예로 들며, 지역 주민을 배제한 축제의 극단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축제 유료화를 추진하면서 남강 행사장을 가로 막은 가림막은 오랜 세월 유등 축제 주인공이었던 진주 시민을 오히려 축제와 분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가림막까지는 아니지만 축제의 주인공이 돼야 할 지역 주민이 축제에서 소외되는 상황은 비단 진주 뿐만 아니라 여느 지역축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양산 대표축제인 삽량문화축전은 '참여'를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시민이 소외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양산을 대표하는 삽량문화축전 역시 일회성 축제라는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 개막식 때 유명 가수 공연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현상은 결국 축제에 시민이 참여하지 못한 채 관객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축제를 주관하는 양산시 역시 축제 성공 여부를 '관람객 00만 명'이라는 숫자에 집착할 때가 많다.
삽량문화축전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러한 비판은 반복된다. 저자가 말하는 관점에 따라 삽량문화축전을 분석하자면 삽량문화축전이 가진 유일한 미덕은 바로 공간의 발견이다.
저자는 유럽 성당처럼 경건한 공간이 도시의 중심이 되고, 사람들은 그 공간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전한다고 말한다. 광주 5.18 묘역이나 촛불을 밝힌 광화문 광장과 같은 공간은 스토리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곳이다.
양산은 지형적으로 중심을 찾기 어려운 지역이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탓에 딱히 중심지라고 말할 공간이 없다. 10년 전 처음 삽량문화축전을 시작할 때 양산천 둔치를 공간으로 선정한 것은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이전까지 종합운동장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저자가 말하는 경건하고 성스러운 공간은 아니지만 양산천은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커진 도시를 유일하게 연결하는 공간이다. 80년대 이전 개발로 인해 환경이 나빠졌지만 이후 도심 휴식 공간을 마련하려는 대부분 지자체와 발맞춰 빠르게 환경을 개선하고 시민휴식공간으로 변모했다.
양산천을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선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양산천에서 운동과 휴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도심 한 가운데 형성된 넒은 둔치는 많은 이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공간이다. 서구사회에서 광장이 하는 역할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삽량문화축전이 양산천 둔치에 자리한 일은 여러모로 긍정적인 점이 많다. 문제는 그 공간을 채우는 프로그램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삽량문화축전의 핵심은 개막공연이다. 수많은 양산시민이 둔치를 메우지만 정작 그들은 차려 놓은 밥상에 모신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즐비한 양산 신도시는 전형적인 이주자의 도시이다.
사실 양산이란 도시 자체가 그렇다.
양산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그나마도 농지가 부족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 산단과 신도시 개발로 지금 모습을 빠른 시간에 갖췄다.
신도시는 말 그대로 계획도시다.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에 사람들은 몸만 옮겨오면 됐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는 일은 불필요하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전까지 저마다 살았던 도시의 추억을 간직한 채 양산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그들이 가진 양산에 대한 추억은 아무 것도 없다. 도시에 대한 스토리가 없는 셈이다.
이주한 양산시민 대부분이 부산사람, 울산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 역시 공유할 스토리가 없는 양산이 가진 한계일 수밖에 없다.
삽량문화축전은 '삽량'이란 양산의 옛 지명을 이름으로 내걸었다. 심지어 지역 토착민 조차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옛 지명을 되살리면서 삽량문화축전은 '가요무대'와 '인가가요'를 결합한 중간 지점, 정체불명의 축제로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지난해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3일 동안 열리는 삽량문화축전은 양산천 둔치를 중심으로 둑 너머 종합운동장, 도로에 걸쳐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지난해 야시장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플리마켓이 들어섰다. 그리고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양산천을 따라 난 도로에는 지역단체들이 참여하는 부스와 거리공연이 이어졌다. 반대로 양산천 둔치에는 축제추진위가 준비한 공연이 계속됐다.
그런데 둑을 경계로 양산천 둔치에는 지역 토박이 주민들이 대부분 자리한 반면, 플리마켓과 체험부스에는 젊은 유입인구가 몰려들었다. 공간에 따라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구성도 달라진 것이다.
추진위가 준비한 프로그램은 '참여'를 내세웠지만 읍면동 풍물대회처럼 사실 동원에 가까운 관 주도 행사가 많았다. 반면 둑 너머 도로에는 시간과 순서에 상관 없이 필요에 따라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다양했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공간에 대한 인식을 통해 '자신' 또는 '시민'이 주인공이 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분한 셈이다. 축제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한다는 말은 결국 도시의 주인인 시민을 손님처럼 여긴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만큼 준비했으니 와서 즐겨볼래"라는 오만이 그 생각 아래 숨어 있다.
저자는 지역 축제 대부분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시민이 빠진 축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도한 도시 마케팅과 지자체장 실적에 집착하다보니 벌어진 필연적인 결과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도시 스토리텔링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를 언급하고 있다. 랜드마크, 축제, 스포츠, 향토기업, 향토음식 그리고 지역언론까지....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랜드마크에 관한 내용이다.
파리 에펠탑, 뉴욕 자유의 여신상 등과 같은 랜드마크는 대부분 도시가 부러워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사는 도시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라는 욕망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가지는 욕망은 규모가 크거나 남다른 형태를 지닌 건축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나라 도시는 유달리 '최고', '최대'라는 수식에 집착한다.
전국 대부분 도시가 내세우는 랜드마크들은 사실 시민이 자랑스러워하기 보다 지자체장이 업적으로 내세우려는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세계 도시 랜드마크는 저마다 특색 있는 자신만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며, 도시가 갖고 있는 고유한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양산타워는 지역 랜드마크가 갖춰야할 스토리 없이 단지 '규모'만을 내세우며 시민에게 어떤 자부심도 주지 못하고 있다.
양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무엇일까?
과거에는 통도사였다. 대한민국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통도사는 그 역사나 규모 모두 전국 수준이다. 대부분 국민이 통도사는 알아도 통도사가 양산에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를 정도다.
하지만 도시화가 이미 이뤄진 양산에서 통도사가 양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역할하기에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다. 도심지와 멀리 떨어진 탓도 있지만 통도사와 양산시민이 유기적으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양산시가 랜드마크로 내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가 양산타워다. 신도시지역 쓰레기를 소각하기 위해 세운 굴뚝에 전망대를 설치한 것인데 전체 높이 160m로 서울 남산타워(236.7m)와 대구 우방타워(202m) 다음으로 높다는 것이 양산시 설명이다. 처음에는 민간에 레스토랑으로 위탁운영했던 것을 현재는 양산시 홍보관과 작은도서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양산타워는 소각장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굴뚝 정상부에 전망대를 설치하게 됐다. 덕분에 원래 예산보다 100억 원이 넘는 추가예산이 필요했다.
저자는 도시 랜드마크가 반드시 역사를 담고 있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양산처럼 새롭게 조성한 도시 경우 역사를 갖추지 못하는 사례가 훨씬 많다. 대신 지역 랜드마크가 그 역할을 다하고 시민에게 자부심을 주기 위해서는 도시가 지향하는 방향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쓰레기 소각장임을 숨기기 위해 만든 양산타워가 인구 30만 도시 양산이 나가야 할 방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삽량문화축전이나 양산타워 모두 양산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속에 스토리는 터무니 없이 빈약하고 시민 공감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빈약한 도시 스토리텔링은 시민을 주인공을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처음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이야기를 접하고, 이것이 인류 문명을 만든 원천이다. 다른 동물과 사람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특징 가운데 이야기를 만들고 전할 수 있는 능력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 소중한 능력을 우리는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지역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전하는 능력은 이른 바 대중매체 시대를 맞아 획일화되고 있다. 다같은 드라마를 이야기하고, 아이돌 노래에 흥얼거리는 시대에서 지역을 이야기하는 화자는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야기 속 주인공 역시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이 아니라 일상을 벗어난 그 누군가가 대신하고 있다.
오는 6월 13일이면 지방선거가 있다. 지방자치, 누군가는 지방주권을 이야기하고 있다. 헌법에 지방분권을 담아 개헌하자는 주장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지만 우리 지방자치는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책을 덮으며 오는 지방선거에 시민을 대신해 일꾼이 되겠다 자처하는 출마자들이 반드시 읽고 지역정책을 어떤 방향으로 설계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번 선거에 소중한 한 표로 주권자로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이 반드시 읽고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되새기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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